다빈치 리졸브 라고 하는 편집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간단한 컷 편집과 세부적인 컷 편집, 사운드 디자인, 색보정, 간단한 모션그래픽까지 모두 가능한 제 인생 최고의 편집 프로그램입니다. 2020년부터 저는 영화와 영상물을 모두 이 프로그램으로 작업했어요. 제 컴퓨터의 그 어떤 프로그램보다 (심지어 심즈보다) 스크린 타임이 긴 프로그램이었죠. 익숙하고도 지긋지긋한 이 프로그램을 벌써 2개월 째 기피중입니다. 단순히 기피라기보단 아이콘만 봐도 숨이 막히고, 손이 떨리고, 다른 자잘한 집안일로 눈이 돌아갈 정도에요. 사연이야 이미 지난 레터에서 열심히 설명했으니 덧붙이진 않을게요. 다만 이 프로그램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일하고 있는 필름 현상소에서 릴스 시리즈를 제작을 맡겨주셨다는 소식도 전에 전했던 것 같아요. 맞아요. 저의 실질적인 노력은 여기서 시작되고 있어요. 제 미감과 감각을 믿어주며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시는 사장님께 보답하고 싶었던 마음이 저를 움직이게 한거죠. 사실 알바에서 부탁받아서 만드는 릴스라면, 핸드폰 카메라로만 촬영해서 적당히 해도 된다는 게 보통의 의견이었어요. 하지만 정말 그러기가 싫었어요. 우선 제대로 기획안을 작성했고, 장르를 가리지 않고 레퍼런스를 찾아냈어요.
티져 영상 스토리보드
실제 티져 영상 스틸컷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스토리보드를 그렸어요. 촬영 장비도 DSLR부터 브이로그용 카메라, 최고사양 아이폰을 모두 동원하기로 했어요. 다만 다시 편집 프로그램 앞에 앉아 있ㅇ들 생각을 하자, 일종의 죄책감처럼 마음 한 켠을 짓누르는 감정이 들었어요. 그래서 괜히 알고리즘을 핑계로 인스타그램 릴스탭에서 직접 편집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나 설마 회피형인가?' 하는 질문을 안고 있는 요즘입니다.
그래도 다시 아이디어 노트를 들고 다니고 있습니다. 떠오르는 샷들을 거부하지 않고 적어내고, 또 그려내고, 더했다가, 덜어내고 있어요. 이 편집의 습관이 머릿속에 조금씩 자리 잡히다보니, 조금씩 저의 미완성 편집본에 대한 생각도 들기 시작했어요. 마침 프랑스에서 친구가 된, 한국어를 하는 프랑스인 친구 Fares의 내한 일정도 가까워지고 있고요.
미뤄두었던 제작지원사업들이나 영화제 출품 공모들을 확인하는 것도 하나씩 해내고 있어요. 어쩌면 2월 안에는 두 번째 편집을 해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요. 많은 첫 관객분들이 말씀주셨던 인터뷰도 넣을 수 있을 것이고요. 사운드 믹싱도 해낼거에요. 그렇게 믿어보기로 했습니다. 책 한 권을 다 읽어내거나, 온갖 뜨개를 다 해내거나, 어려운 스도쿠 문제를 푸는 등의 작은 성과를 지속했더니 별 용기가 다 생깁니다. 다음 레터는 조금 더 희망으로 채워서 돌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