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4개월 만이네요.
2025년의 봄이 모조리 지나가는 동안 모두들 잘 지내셨을까요.
부디 겨우 찾아온 이 봄을 즐거이 보내셨길 바랍니다.
우선 진심으로 죄송했다라는 문장을 먼저 전하고자 합니다. 영화를 언제까지 완성해보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 그리고 이러한 사실이 마음 속에서 돌이 되어서 부담감을 느끼다 못해, 결국 죄책감과 우울의 바다에 가라앉아 많은 것을 멈춰버렸던 것들에 대하여 참 죄송했습니다. 길고 긴 변명을 생각했다가, 또 지우기를 한참 반복했고, 이내 모두 놓았던 4개월이었습니다.
지난 4개월. 제가 놓은 것은 영화 뿐만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육체를 놓았고, 정신을 놓았고, 사람을 놓았고, 꿈과 자아를 놓고, 그저 시간을 다 흘려보냈습니다. 분명 제작지원이나 영화제 출품공모를 하나 둘 놓치며 초조해했었는데, 점점 내가 속한 세상의 일이 아닌 것처럼 그 소식들을 흘려보내고 있는 저를 발견했습니다. 이젠 이 뉴스레터를 발송하는 사이트의 편집 기능도 버벅거리고 있네요.
요즘 저는 지난 한 해 (혹은 그 이전 해 부터), 그토록 바랬던 돈을 벌고 있습니다. 아, 필름 현상소 일은 그만 뒀습니다. 이제는 다시 명함이 있는 회사원이에요. 때로는 묵묵히, 때로는 답답해하다가, 자아를 포기하다가, 문제를 극복하다가 하며 살아요. 한 달에 한 번, 단 얼마라도 통장에 꽂히는 이 삶이 참으로 그리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간과 돈을 개인의 회복에 쓰고 있어요. 영화가 아니라요.
실은요. 영화를 위해 아끼고, 영화를 위해 생각하고, 영화를 위해 일 하는 거 너무 힘들었어요. 내 영화가 걸작인지 아닌지 스스로도 모르는데, 확신 없는 것을 위해 살기엔 전 너무 가난했어요. 이 뉴스레터를 받는 분들은 대부분 저와 제 영화를 응원해주고 있는데, 이 좋은 분들의 응원조차 실망시키는 사람이 될까봐 (이미 된 것 같기도..) 정말 무서웠어요. 그래서 힘들고 무서워서 옴짝달싹 못하는 주제에, 뭔가 계속 하는 사람처럼 거짓말 하는 것도 괴로웠어요.
그래서 숨었습니다.
대신 차라리 한 달에 단 하루라도 괜찮은 날이 있다면, 정말 그 날 단 1분이라도 편집을 하자라고 마음 먹고 조금씩 편집했어요. 괜찮은 날은, 다행히도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많아졌구요. 돈을 벌고, 몸이 나아져서 그렇다기 보단.. 부끄럽지만.. 자아가 비대한 사람의 장점일까요.
마치 지난 몇 개월간 한국에 일어난 모든 사건이 제 영화를 응원하는 것 같았거든요. 제가 영화에 결론을 못 내리니까. 역사가 결론으로 이끌어주는 것만 같았어요. 물론 이 역사는 모두에게 각자 다른 결론을 가져다 준 것 같지만요.
근데 그 덕분에 지금 많은 이들에게 2024 파리 올림픽은 이미 잊혀졌을 거에요. 그래서 어떤 아줌마가 10년 만에 프랑스에 가서 파리 올림픽 보는 이야기 같은 건, 정말 아무런 힘도, 주목도도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를거에요. 아니 사실 처음부터 딱히 중요한 이야기도 아니었을 수도 있지만서도요. 아무튼, 아무도 주목하지 않을 이야기라는 생각이 역으로 이 영화의 컷편집을 끝낼 수 있게 도와줬습니다. 그리고 제가 세상과 현상을 보는 방식을, 참아내는 방식을 자유롭게 서술했어요. 마치 이 뉴스레터처럼요.
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컷편집을 끝냈어요. 이젠 돌아보지 않을거에요. 남은 단계는 듬성 듬성 되어있는 나레이션을 녹음하는 일과, 오프닝과 클로징 그리고 크레딧을 만드는 일 일거에요. 그 다음은 음악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은 다소 늦은 프로덕션북을 제작하고, 텀블벅 후원자 분들께 영화와 프로덕션북을 전달해야겠지요. 그러다보면 올해 영화제에서 하나도 상영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잊혀지고 내년이 오겠죠?
그렇게 시간이 흐르다보면 제가 영화를 만드는 사람이었다는 것도 다 잊혀진 날도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때가 되면, 머리를 깨가며 기획하고, 사람들을 설득해서 돈을 모으고, 실존하는 카메라를 들고, 실재하는 올림픽 행사에 가서, 실제로 촬영하고 말을 해내고, 내 손으로 한 컷 한 컷을 고르며 직접 편집한 이 영화를 돌아보며. '와, 이걸 어떻게 AI 없이 다 직접 했지?' 하며, 비로소 제 젊은 고통을 대견하고 자랑스러워 하며, 이 비효율 인간을 함께 기다려준 분들께 몇 배로 감사하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말이 두서 없고 길었습니다. 지금은 AI를 적극 활용하는 회사의 무려 '브랜드 콘텐츠 리드' 포지션으로 살고 있는 덕분에, 예전처럼 1주 혹은 2주에 한 번 소식을 전하는 건 조금 어려울 수도 있다고 이번엔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그래도 이젠 거의 다 왔으니, 조금만 덜 미워하고 덜 실망 해달라고 다시 한 번 염치없이 부탁드립니다. 이런 창작 방식도 이젠 곧 멸종할테니, 조금만 더 끝까지 지켜봐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다음 달에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조금 더 밝고 건강해진 모습으로, 자신감 있는 모습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정연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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